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평가 == >계속 밀고 가서 [[압록강]] [[두만강]] 라인까지 우리가 올라갔습니다. >완전히 우리가 통일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중국공산당]]이라고, 그래서 중공군이라고 불렀는데, >중국 입장에서는 코앞까지 UN군이 밀고 들어왔으니까, >위기감을 느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전투병력을 파견하는데, >원래 중국 하면 [[삼국지]]! '지략이 뛰어나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 다 필요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인해전술]]'입니다. >얼마나 군인 숫자가 많았느냐면, 속설이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 그래서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 두 명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는 게 아닙니까? > ---- >[[https://youtu.be/PFXSqRWVxcc|설민석의 [영화] 국제시장 1부. 6.25전쟁과 흥남철수]], 중국인민지원군이 '인해전술'을 펼쳤다는 잘못된 인식의 예시 냉전 시기 한국에서는 중공군(중국인민지원군)은 무기도 별볼일 없고 작전도 없이, 그저 병력 수만 믿고 밀어붙이는 무식한 이미지로 알려져있다. 6.25때 개입한 중국군을 표현하는데는 [[인해전술]]이라는 단 한마디로 이야기될 수 있다. 그래서 병력 수를 제외하면 모든게 부족한 군대처럼 여겨졌다. 군기도 엉망이고, 작전능력도 개차반인 [[당나라 군대]]라는 인식이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강했고, 위의 [[설민석]] 강의에서 드러나듯 현대에도 여전히 짙게 남아있다. 흔히 "중국군=약체 당나라군"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었다. 하지만 매튜 리지웨이는 물론이고, [[채명신]], [[백선엽]] 등, 한국군 장성들의 회고록에서도 중공군의 '''군기나 사기에 대해서 매우 호평했고 반대로 한국군에 대해서는 영 좋지 않게 보았다.[* 미군 장성들은 한국군에 대해서는 아예 전력으로 넣지도 말라고 혹평했다. 이러한 점은 한국 대통령이던 이승만도 마찬가지여서 전쟁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군의 전작권을 미군한테 넘겼고, 전쟁이 끝나고 나서 미군이 전작권을 돌려주겠다고 해도 거부했다. 그만큼 대통령인 이승만조차 한국군의 능력에 대해 믿지 못해서 차라리 외국군인 미군에게 전작권을 계속 맡기겠다고 한 것이었다.]''' 한국전쟁기의 실상에 관심을 갖는 [[밀덕후]]들이 많아짐에 따라 적어도 한국전쟁을 전문으로하는 밀덕 사이에서는 한국전 당시의 중공군에 대한 냉전적 저평가는 거의 사라진 상태. 특히 중국군 참전 초기에는 유엔군이 중국군의 규모를 최대 6~7만 명 규모로 오판한데다가(...) 중국군이 싸움을 피한다고 보고 중국군의 유인에 말려든 탓에 우회포위에 걸려들어 각개격파되면서 중국군은 당초 예상보다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적을 유인하고 우회기동으로 포위섬멸하는 전략전술적 능력이 탁월했다는 것. 중공군이 최근 호의적으로 재평가받는 이유중 하나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끼치는 그시대 군인들과는 정반대로 민간인에게 사적으로 접근만해도 엄벌할정도로 엄한 군기를 유지하며 오히려 민간인들을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후술하였듯이 이타적 선의가 아니라 객관적인 전력의 열세를 민심 확보로 만회하기 위해 초인적인 군기를 유지시킨 것이다. 마오쩌둥의 군사이론은 무기가 아니라 병사 개개인의 희생정신과 자발성을 가장 중시했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론이고, 현실은 적지 않은 병력을 징집했었고 중일전쟁때는 강제로 징집한 병력이 탈영하는 상황도 발생해서 부대에 따라서는 이러한 탈영률이 30%를 넘기기도 했다. 따라서 사기가 있을 리 없는 국민당군 투항병을 형벌부대로 운용하여 최전선에서 총알받이로 썼다는 것은 완전한 사실은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 사실이다. 실제로 지원군에는 국민당군 투항병 출신들이 많았으며 이 때 포로로 잡힌 이들은 석방된 후 대부분 대만으로 갔다. 중국군은 큰 인명손실을 보긴 했지만, '''중국과 미국 사이에 [[북한|완충지대]]를 유지한다'''[* 지금까지도 중국 정부가 한반도 정책에서 가장 중시하는 목표이다. 이에 따라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고 있는 북한 정권을 유지시켜 주기 위해서 지원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주한미군이 존재하고, 한미군사동맹이 유지되는 한 이것은 바뀌지 않는다.]는 목적을 달성했고, 유엔군과의 3년간의 대결을 통해서 2차대전 [[일본군]] 수준도 안 되었던 통신-보급-화력 등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할 수 있었다. 거기에 막강한 미군과 일진일퇴를 하면서 보여준 선전으로 중국측이 그토록 염원했던 국가의 위상은 한껏 드높였기 때문에 중국 입장에서 한국전쟁 참전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완승은 아니지만, 5~6년전 [[중일전쟁]] 때만 해도 미군, 소련군에게 밀렸던 [[일본군]]에게 털리기한 한다던가 [[아편전쟁]] 이래 100여년간 서양세력에게 짓밟히기만 했던 중국이라 세계 초강대국 미군과 싸운 한국전쟁의 무승부는 충분히 중국의 자존심을 세운 셈. 그러나 희생자 숫자나 지리적인 이점을 감안하면 절대 무승부는 아니다. 중국군이 밀렸던 상대로 일본군이 들어가 있어서 의아할 수 있는데, 1944년의 일본은 전체 전황에선 패색이 짙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전선에서는 중국군을 묵사발로 만들면서 활개치고 있었다. 물론 농업국가에 불과한데도 압도적인 물량과 잠재력, 끈기를 보여준 중국군을 꺾지 못해 결국 일본은 중국에게 항복했지만, 중국 입장에선 명쾌한 승전으로 보이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중일전쟁은 사실상 일제와 장제스의 국민당 간의 싸움이지 세력 확장에만 힘을 쏟은 공산당이 큰소리칠 입장도 아니다. 실제로 마오는 나중에 일본에게 중국을 침략해줘서 감사하다고 개드립을 쳤다. 중국은 아직 한국전 개입(항미원조)을 "정의의 전쟁"이라고 평가하고 있다.[[https://m.blog.naver.com/minjune98/222292362869|#]] 현재는 정부에서 검열하는 [[바이두 백과]]에서도 북한이 먼저 침공했다고 명시하고 있다. 대신 북한이 먼저 공격한 건 맞는데 [[내로남불|어쨌건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한 시점에는 미국이 침략자가 되었으니까 지원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1950年6月25日,朝鲜人民军开始进攻韩国(人民军主力为四野三个师),朝鲜战争爆发"] 이 문서 처음에도 나오지만, 이것이 중국이 개입한 명분이기도 하고. 일부 한국인들은 중국에 사과를 받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중국이 6.25 전쟁 참전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수교를 반대하는 여론도 있었다. 하지만 상임이사국인 중국을 상대로는 현실적이지 않은 요구였기 때문에 한중수교 당시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논의되지는 않았다. 각설하고, 중국과 북한의 관계가 2010년대 들어 소원해지고, '''북한의 여러 막장행각이 중국에도 알려지면서''', 중국의 웹사이트에서는 "지원군 전사들이 지하에서 통곡할 지경"이라는 식으로 북한체제를 도왔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사람도 많다. 물론 완충지대 혹은 동맹으로서 북한의 가치는 인정한다. 이중에는 2차 한국전쟁이 터지면 참전하자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 이유는 북한주민들과 조중우호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고 실제론 완충지인 북한에 영향을 뻗치기 위함이다. 이 전쟁에서 전사한 중국군이 매우 많았다. 또한 많은 중국인들은 항미원조 전쟁에서 중국군은 미국과 싸웠을 뿐, 한국과 싸웠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한국 전쟁에서 중국군 투입 이전에는 '조선전쟁'이라고 불리고, 그러다 유엔군이 [[삼팔선]]을 넘어 진격하면서 중국군을 투입했고 이때부터 '항미원조 전쟁'으로 불리게 된다. 한편으로 긍정적인 재평가가 지나친 나머지 되려 그들을 '''과대평가하는 경향들'''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중공군도 한국전쟁 후반기로 들어설수록 엄청난 물량을 쏟아부으면서도 미군과 한국군에 참패하는 경우도 많았었고([[백마고지 전투]], 퀸-박 고지전투, [[금성 전투]], [[도솔산 전투]]) 무엇보다도 기술적으로도 보급력으로도 낙후된 군대여서 다 이긴 전투를 물자의 보급부족이나 기술력 차이(특히 공군력)로 도로 패배를 맛보는 전투도 상당했다. 초반에 UN군이 일패도지한 것은 어디까지나 대대급 전술훈련 경험이 고작이었던 한국군이 경험부족으로 중공군에게 뚫려 발생한 일이었지, 한국군이 사단급 이상 전술훈련을 완료한 1951년 하반기 이후로는 많이 달라졌다.~~암! 아암!~~ 그리고 "국공내전으로 단련된 중공군"이라고 하는데, 우선 [[국공내전]]에 동원된 국민당/공산당의 부대 모두 [[관동군]]에 밀리는 수준이었다. 전쟁 말기 [[관동군]]의 수준은 2선부대를 넘어, 최후에는 소총 보급도 제대로 못받아 냉병기로 무장하기까지 한 부대였다.~~오합지졸 관동군에게 밀리던 놈 둘이 싸운다고 단련이 되겠냐~~ 대신 게릴라전 위주로 싸웠던 덕분에 산지 도보주파 능력 같은 부분에서는 단련이 되어있던 게 사실이고 이 때문에 도보에 의존한 기동전이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한국군은 그 국공내전 수준의 경험도 없었고, 미군에게 지원받은 국민당 중앙군의 무장수준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여담이지만 한국전쟁 터지기 직전 미국도 한국 정부의 전차 등 무기 공여 요청에 대해 '''"최신 개런드 소총 쥐여줬고 우리가 미국식 사단편제 완편해서 훈련시켜주잖아. 그 정도면 아시아에선 충분히 강군이지 뭘"''' 하는 식으로 반응했다고 한다. 물론 이승만의 북진드립 때문에 우려했던 부분도 있다.] 이처럼 군사적 역량에 대해서는 '''조직력과 군기는 괜찮았지만 전문지식, 무기/장비 등 제반 전투력은 역시 많이 부족했던 군대''' 정도로 평가되나, 민간인에 대한 배려와 각종 [[대민지원]]만큼은 [[6.25 전쟁]] 참전 당사자 대부분에게 호평을 받는 점도 특징이다. 애초에 [[국공내전]] 당시부터 모든 점에서 열세였던 [[홍군#s-2|중국공농홍군]]과 [[팔로군]]이 혹독한 토벌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 중 하나가 [[삼대기율 팔항주의]]로 일반 대중의 민심을 얻은 점이었다. [[6.25 전쟁]] 당시에도 이러한 규율은 대체로 잘 지켜져서, 보급이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서도 [[대한민국 국군]] 및 [[미군]] 포로, 남북한 민간인 모두를 대체로 잘 배려하였다. > 우리는 [[홍군]]([[紅]]軍) 시절부터 포로를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급식도 지원군보다 좋은 것을 제공한다.[* 원래 우직한 성격인 [[펑더화이]] 입장에서는 문자 그대로 좋은 의미에서 한 말인데, 이 말이 나중에 루산회의 이후 실각 과정에서 친미주의자로 비판받는 빌미가 된다. 게다가 펑더화이는 이것 때문에 문혁 당시에도 홍위병들에게 조리돌림당하고 만다.] > ---- > [[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초대 사령관 > 10여년 전만 해도, 휴전선 인근 마을에 가면 이런 말 하는 촌로들을 만날 수 있었다. “전쟁 때 중공군들이 제일 친절했다. 민심 얻는 법을 잘 아는 군대였다. 중공 오랑캐가 어쩌고저쩌고 폄하하는 노래가 한동안 유행했다. 전쟁 시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차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양민과 부녀자들에게 정말 못되게 군 놈들은 따로 있었다.”[* 대체로 [[조선인민군]]과 [[대한민국 국군]] 모두 골육상쟁의 이념적 증오 때문에 더더욱 가혹한 짓을 많이 저질렀다.] > ---- > [[https://news.joins.com/article/23639705|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02>]], 《중앙SUNDAY》 물론 여기에는 단순한 선의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오쩌둥]]은 어차피 [[6.25 전쟁]]으로 미국을 완전히 굴복시킬 수도 없으므로, 이 기회에 공산주의 중국에 우호적인 인사들을 많이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나름 투철한 저널리스트였던 [[에드거 스노우]]가 결과적으로는 친중 프로파간다에 크게 일조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 포로는 전쟁 끝나면 돌려보내야 한다. 훗날 우리 선전원이 될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대우해라. 중국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습득한 사람을 물색해서 관리를 맡겨라. > ---- > [[마오쩌둥]]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국가주석 이를 위해 포로관리 총책임을 맡은 중조연합총부 정치부 주임(중국 인민지원군 내 서열 3위) 두핑(杜平)은 다양한 선무공작을 펼친다. [[미군]]이나 [[영국군]] 등 서방측 포로에 대해서는 미인계까지 써가면서 각종 이념적 세뇌를 하고 중국에 눌러 앉히려는 시도도 했다. 반면 상대적으로 쓸모가 덜한(?) [[대한민국 국군]] 포로는 [[조선인민군]]에게 넘겨 결과적으로 많은 핍박을 받게 만들었다. 또한 거대한 조직에서 규율이 항상 제대로 지켜질 리는 만무해서, 전장에서의 포로 학대 및 학살 사례도 여럿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특히 생김새가 확연히 차이 나는 [[터키군]] 포로들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게 대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그런데 이런 일도 있었다. 중공군이 추운 날 미군 포로들에게 따뜻한 물을 마시라고 주었는데, 몇몇 포로 장교들이 샤워하는데 다 써버렸다. 그걸 본 중공군들은 딥빡쳐했다고 한다…물론 중공군도 공산주의자답게 무신론자들이라 서방 유엔군 포로들이 절대 종교행사를 치르지 못하게 감시병을 동원하였다.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는 물론 몇몇이 모이지도 못하게 했다고…(근데 이건 제네바 협정 위반이다). 터키군 포로들이 가혹행위를 당한 이유도 다름 아닌 이들이 무슬림이라 하루에 5번 씩 기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군이 좋게 볼 리가 없어, 포로들은 여느 출신국이든 무신론과 공산주의 이념을 받아들이도록 강요받았다(이것도 역시 위반 사항이다). 결국 중국 인민지원군의 규율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는 해줄수는 있지만 이것도 경우에 따라 지켜지지않을때도 있었으며 당연히 포로를 무조건 좋게 대해준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다만 당시 기준으로 볼때 [[인민재판]], [[보도연맹 학살사건]], [[국민방위군 사건]]처럼 군기가 엉망인 경우도 흔했고 민간인들에게도 잔혹하게 대할때가 많았던 [[대한민국 국군]]과 [[조선인민군]]에 비해서[* 이후의 대한민국 국군의 경우에는 민사작전 수행을 잘 하는 편으로 평가되지만, 이때는 민사작전이라는 개념은 안드로메다로 날리던 시절이었다. 무슨 일본군이 학살을 저지르는 마냥, 자국민을 학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던 시절이었다. ] [[민사작전]]을 잘 수행한데다가 군율도 잘 잡혀있었기 때문에[* 미군도 한국군이나 북한군에 비해서 민사작전은 잘 수행한편이지만, 이쪽도 노근리 학살사건같은 민간인 학살사건은 벌어졌다. 그나마 [[존 하지]]가 미군정 사령관으로 있을때보다는 훨씬 개념은 있어서, 한국군이 저지르는 학살을 막는다든지, 밀가루나 전투식량, 스팸, 초콜릿같은 음식은 잘 주어서 이걸로 민심을 어느정도 잡기는 했다. ] 민간인 학살사건같은 문제되는 짓을 안 일으켜서 높게 평가받는것이라고 보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